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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장준하 선생님이 암살되신 장소에 다녀왔습니다


故장준하 선생님은 박정희의 유신독재에 맞서 가장 치열하게 싸우셨던 분입니다.


그리고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의 약사봉에서 의문사를 당하셨습니다.


아니지요.... 의문사가 아니지요...... 이제 말은 바로 해야겠습니다.


故장준하 선생님은 암살을 당하셨습니다. 


암살......



11월 3일(일)... 

저는 故장준하 선생님의 장남이신 장호권 선생님과 함께 경기도 포천의 약사봉에 직접 다녀왔습니다.


버스로 약 1시간 30분을 달려 장준하 선생님께서 암살을 당하신 곳으로 들어가는 약사계곡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안내표시가 되어있지 않아서 나중에 혼자서 다시 찾아오기는 참 힘들겠더군요.


장호권 선생님 말씀으로는 예전에는 '장준하 선생이 원통하게 돌아가신 곳'이라는 이름의 안내 표지판이 있었지만 지금은 없어졌다고 하더군요.


문득 파주에 있는 '장준하 공원'을 방문했던 기억이 났습니다.


너무도 초라하고 관리도 부실해서 참 안타까웠던 기억이 되살아나서 씁쓸했습니다.


관련글 - 너무도 초라한 '장준하공원' 마음 한켠이 너무 무겁습니다



위 사진은 약사봉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논두렁' 입니다.


그런데.... 이 사진이 정말 중요합니다.


예전에 'SBS 그것이 알고싶다'를 통해서 장준하 선생님의 죽음에 대해서 집중 조명이 된 이후 군인 한명으로부터 제보가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 군인은 사고 당시에 장준하 선생님의 시신을 직접 목격했는데 그 군인의 진술은 다음과 같습니다.


"장준하 선생은 논두렁 구석에 눕혀져 있었다."


그런데.... 포천 약사봉 근처에는 논두렁이 없습니다.


지금 위 사진의 논두렁은 포천의 약사봉으로부터 약 30분 거리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는 다음과 같은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장준하 선생님은 바로 이 논두렁에서 암살을 당하셨고, 암살을 추락사로 위장하기 위해서 장준하 선생님의 시신은 포천의 약사봉으로 옮겨졌다."


실제로 이 가설이 현재까지의 분석 결과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약사계곡의 입구로부터 약 30분을 걸어가자 장준하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다고 알려진 약사봉 아래쪽에 도착했습니다. 


이 푯말이 박혀있는 곳은 유족들이 장준하 선생님의 사고소식을 접하고 사고현장으로 달려왔을 때 시신이 놓여져 있던 곳이라고 합니다.



장준하 선생님의 장남 장호권 선생님이 약사봉에 도착했을 때 바로 이 바위 위에 시신이 모셔져 있었다고 합니다.


장호권 선생님은 그때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이쪽에는 장선생님(아버님)이, 저쪽에는 어머니가, 그리고 저쪽에는 막내 호준이가....."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아버지를 잃은 상처와 충격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더군요...



푯말이 있는 곳으로부터 장준하 선생님이 추락하셨다고 알려진 사고지점까지는 약 10분정도 가파른 길을 올라가야 나옵니다.


나이가 드신 분들이나 여자분들은 쉽게 오르지 못할 정도로 험했습니다.


특히 오전에 비도 살짝 내린 상태에다가 바위에는 이끼가 가득해서 오르는데 상당히 힘이 들었습니다.



이곳이 바로 장준하 선생님이 추락하신 것으로 알려진 절벽입니다.


어림잡아 보더라도 50미터 정도는 되어 보였고, 경사도 70도 이상 되는 가파른 절벽입니다.


그런데, 만약 장준하 선생님이 이곳에서 추락하셨다면 왜 저토록 가파른 절벽을 올라가신 것일까요?


게다가 저 절벽을 오르려면 옆쪽 능선을 따라 약 1시간 30분 이상을 올라가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장준하 선생님과 함께 동행한것으로 알려진 유일한 목격자 '김용환'이라는 인물의 진술에 의하면, 장준하 선생님이 절벽아래에서 식사를 하고 절벽을 오르려고 빠져나간 시간은 오전 12시입니다. 


김용환은 장준하 선생이 혼자 산에 오르려하자 함께 따라나섰다고 합니다. 


그리고 절벽 꼭대기에서 장준하 선생님이 추락을 한 것을 보고 다시 아래로 내려와서 일행들에게 사고 소식을 전한 시간은 오후 1시 30분입니다.


불과 1시간 30분만에, 그것도 당시 건강 상태가 좋지 않으셨던 장준하 선생님을 모시고 정상까지 갔다가, 사고가 나자 다시 내려와서 일행들에게 알리는데 까지 걸린 시간이 불과 1시간 30분....


게다가 김용환은 장준하 선생님에게 인공호흡까지 했다고 진술했다 합니다.


이걸 믿으라는 건가요?


더욱 재미있는 사실은 2시가 되기도 전에 장준하 선생님의 아내 김희숙 여사는 누군가로부터 장준하 선생의 사고소식에 대한 전화를 받았다고 합니다.


나중에 조사를 해보니까 전화를 한 사람은 바로 '김용환'이었습니다.


당시에 핸드폰이 있었나요? (오늘 보니까 핸드폰도 안터질 정도로 깊은 산속이더군요)


인근 마을에도 전화기 자체가 아예 없었다고 합니다.


앞뒤가 안맞아도 너무 안맞습니다.



장준하 선생님이 추락했다고 알려진 곳의 바닥은 단단한 바위 투성이입니다.


이런 곳에 사람이 떨어지면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장준하 선생님의 시신은 너무도 깨끗했다고 합니다.


특히, 사람이 떨어지게 되면 본능적으로 무엇인가를 움켜쥐게 되어 있는데, 장준하 선생님의 손톱은 너무나도 깨끗했습니다.


그리고, 장준하 선생님의 보온병도 깨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느 회사에서 만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참 튼튼하네요....



절벽 아래에는 장준하 선생님의 영혼을 기리는 추모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여기가 아닙니다. 


장준하 선생님이 돌아가신 곳은 여기가 아닙니다.....



장준하 선생님의 장남 장호권 선생님이 몇 가지 뒷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현재까지 조사된 바에 의하면 장준하 선생님의 죽음에 청와대가 개입해있는 것은 거의 확실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특히 당시에 이런 일을 벌일수 있는 곳은 바로 '청와대 경호실'이며, 거기에는 '전두환'이 '차지철' 밑에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장준하 선생님과 같은 억울한 죽음을 당하신 분들을 위한 '장준하 특별법' 제정을 준비하고 있지만 현 정권에서는 어려울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과거에 장준하 선생님의 죽음에 대한 진상조사위원회를 무산시킨 사람이 당시 법사위원장이었던 현 청와대 비서실장 '김기춘' 이기 때문입니다.


관련글 - 우리는 왜 유신의 부활을 반대하는가



장준하 선생님은 이미 두 번 죽었습니다.

 

38년 전 암살로 한 번 죽었고,

38년 동안 실족사로 위장되어 두 번 죽었습니다.

 

만약 우리의 기억에서도 잊혀진다면

장준하 선생님은 세 번째 죽는 것이 될 것입니다.


장준하 선생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민주주의를 열망했던 그 정신을 꼭 기억했으면 합니다.